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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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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랜드사]]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536349><tablebordercolor=#536349> {{{#fff {{{+1 '''오로아 조약'''}}}[br]'''Treaty of Auroa'''}}} || ||<width=100><bgcolor=#536349> '''{{{#fff 서명}}}''' ||<bgcolor=#ffffff,#1c1d1f> 1963년 11월 30일 || ||<bgcolor=#536349> '''{{{#fff 장소}}}''' ||<bgcolor=#ffffff,#1c1d1f> [[델라웨어]]령 [[리브라 연방주|헨셀슈타인 연방식민정부]] 오로아 || ||<bgcolor=#536349> '''{{{#fff 중재국}}}''' ||<bgcolor=#ffffff,#1c1d1f> [[델라웨어]] || ||<bgcolor=#536349> '''{{{#fff 당사국}}}''' ||<bgcolor=#ffffff,#1c1d1f> '''협상국'''[br][[플로렌시아]], [[루이나]], [[웨스타시아]], [[빌베른]][br]'''동맹국'''[br][[사비에트]], [[고랜드]], [[체르드]], [[마베라|라 마베라 연방]] || ||<bgcolor=#536349> '''{{{#fff 주요 내용}}}''' ||<bgcolor=#ffffff,#1c1d1f> 1958년 3월 12일 이전 국경 회복[br]동맹국의 배상과 군비 제한[br]포르틸락해협 통항 조항[br]조약 감시위원회 설치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로아 조약'''(Treaty of Auroa)은 1963년 11월 30일 [[델라웨어]]의 랜드해협 식민정부 소재지인 헨셀슈타인의 수도 오로아에서 협상국과 동맹국 사이에 체결된 [[1차 랜드 전쟁]]의 강화 조약이다. 조약은 전쟁 전 국경을 그대로 되돌리는 대신, 패전한 동맹국에 배상과 군비 제한을 부과하고 포르틸락해협의 통항 질서를 조약으로 확인했다. 영토를 바꾸지 않고 기존 질서를 더 단단히 묶어 두었다는 뜻에서 흔히 '''강화된 현상 유지'''라고 불린다. == 배경 == 1963년 들어 동맹국은 더 이상 전쟁을 이어 갈 수 없는 상태였다. 체르드는 협상국군이 공업 지대까지 밀고 들어온 가운데 식량난에 시달렸고, 사비에트는 동사랜드를 잃은 데다 흉작까지 겹쳤다. 5월 체르드, 6월 라 마베라가 차례로 휴전했고, 8월 20일 사비에트와 고랜드가 휴전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멈추었다. 협상국 역시 전쟁을 끝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플로렌시아에서는 장기전에 지친 여론이 조기 강화를 요구하고 있었고, 1962년 10월 사비에트의 고고도 핵실험 이후 협상국은 사비에트 본토로의 진격을 포기한 상태였다. 양측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강화 회의의 과제였다. == 강화 회의 == 강화 회의는 1963년 9월 16일 중립국 델라웨어의 중재로 헨셀슈타인에 위치한 오로아에서 열렸다. 협상국에서는 플로렌시아의 앙드레 뒤몽 총리가 직접 대표단을 이끌었고, 동맹국에서는 사비에트 대표단이 사실상 동맹국 전체의 입장을 대변했다. 가장 큰 쟁점은 영토 문제였다. 플로렌시아는 체르드와의 국경 지대를, 웨스타시아는 라 마베라와의 국경 지대를 떼어 받기를 원했다. 반면 루이나는 영토를 바꾸면 점령지 통치와 반환 요구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핵무기를 가진 사비에트와의 긴장도 커질 것이라며 영토 변경 없이 동맹국의 군사력을 묶어 두자고 주장했다. 회의는 두 달 가까이 공전한 끝에 루이나의 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배상과 군비 제한 조항을 강화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해협 조항을 둘러싼 논쟁도 치열했다. 사비에트는 1957년 해협 항행 규칙의 완전한 철폐를 요구했으나, 협상국은 규칙의 핵심인 군함 사전 통보제를 조약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상선의 자유 통항을 명문화하는 대신 군함 사전 통보제를 유지하는 절충안이 채택되었다. 콘스탄티노폴의 혁명정부는 해협의 주권국으로서 회의 참가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혁명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루이나와 플로렌시아가 참가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해협의 운명은 해협의 주인이 빠진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 주요 내용 == === 영토 === 모든 당사국의 국경은 1958년 3월 12일 이전 상태로 되돌려졌다. 동맹국군은 휴전 이전에 이미 점령지에서 밀려난 상태였으므로, 실제 철수 대상은 체르드 영내에 진주한 협상국군이었다. 협상국군은 조약 발효 후 6개월 안에 체르드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유고랜드]]는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웨스타시아의 영향 아래 남았다. === 배상 === 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는 협상국에 전쟁 배상금을 15년에 걸쳐 분할 지급하기로 했다. 사비에트는 전쟁 배상 대신 통상파괴전으로 격침된 협상국 상선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사비에트는 이를 배상이 아닌 '해난 보상'이라고 부르며 패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 군비 제한 === 체르드는 포르틸락해협 연안 30km 안의 요새와 해안포대를 해체하고, 해군의 총톤수에 상한을 받아들였으며, 잠수함 보유가 금지되었다. 라 마베라는 웨스타시아와의 접경에, 고랜드는 유고랜드와의 접경에 각각 비무장 지대를 두고 상비군 규모를 제한받았다. 사비에트는 랜드해협 중앙 해역에 배치할 수 있는 수상함의 총톤수에 상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비에트가 끝까지 거부한 탓에 잠수함은 제한 대상에서 빠졌고, 이 공백은 이후 사비에트 해군이 잠수함 전력을 중심으로 재건되는 계기가 되었다. === 해협 조항 === 조약은 평시 모든 상선의 포르틸락해협 자유 통항을 보장했다. 군함에 대해서는 1957년 해협 항행 규칙의 사전 통보제를 조약 당사국 전체의 의무로 확인했으며, 전시에는 교전국 군함의 통항을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 감시와 포로 === 군비 제한 조항의 이행을 확인하기 위해 협상국 4개국과 중재국 델라웨어가 참여하는 '''오로아 조약 감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위원장은 델라웨어가 맡았으며, 위원회는 체르드·라 마베라·고랜드의 비무장 지대와 해군 시설을 정기적으로 사찰할 권한을 가졌다. 전쟁 포로는 조약 발효 후 6개월 안에 모두 교환하기로 했다. == 이행 == 영토 철수와 포로 교환은 대체로 기한 안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배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체르드와 라 마베라는 전쟁과 봉쇄의 후유증으로 경제난에 빠졌고,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배상금 지급을 여러 차례 미루었다. 배상 부담은 두 나라에서 반협상국 여론과 좌파 세력의 성장을 부채질했다. 감시위원회의 사찰도 갈등을 불렀다. 체르드는 사찰이 주권 침해라며 거듭 반발했고, 사찰단의 활동이 제한되는 일이 잦아졌다. 사비에트는 수상함 톤수 제한은 지켰지만, 조약에서 빠진 잠수함과 미사일, 우주 전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해협 조항은 처음부터 불안정했다. [[콘스탄티노폴]]은 자국이 참여하지 않은 조약의 해협 조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1960년대 내내 이어졌다. 1970년 루이나의 콘스탄티노폴 침공은 이 긴장이 폭발한 결과였다. == 평가 == 오로아 조약은 핵무기를 가진 사비에트와의 확전을 피하고 영구 점령의 부담을 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타협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토를 빼앗지 않았기 때문에 패전국의 실지 회복 운동을 막았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반면 조약이 전쟁의 근본 원인인 해협 문제를 콘스탄티노폴을 뺀 채 봉합했고, 체르드와 라 마베라에 과도한 배상을 지워 두 나라의 정치 불안을 키웠다는 비판도 크다. 잠수함을 제한 대상에서 뺀 군비 제한 조항 역시 허점으로 지적된다. 조약이 남긴 이 문제들은 10년 뒤 [[2차 랜드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 관련 문서 == * [[1차 랜드 전쟁]] * [[1차 랜드 전쟁/전개]] * [[1차 랜드 전쟁/영향]] * [[콘스탄티노폴]] * [[델라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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